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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 보는 세상

아주 많이 늦은 리뷰 - 사진과 책


나의 오지랖은 안테나가 몇 개 정해져 있다.  그 중 하나가 책 권하기. 읽고 좋았던 책을 주변 사람들에게 권해주는 경우인데 대부분 가까이 있는 지인들이라 어떤 책이 필요한지는 약간만 주의를 기울이면 금방 알 수 있다. 권한다고 모두에게 반응이 좋은 건 아니지만 도움이 되었다는 말을 들으면 나의 몇가지 오지랖 중에서는 아직까지는 꽤 쓸만하다고 여기고 있다. 


며칠전 이번엔 거꾸로 참고가 될만한 책들을 추천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마침 시내 나갈 일이 있어서 거의 한 달만에 교보문고 매장을 찾았다. 사진코너는 축소되었고 공사중인지 다소 어수선했다. 나는 새로 나온 낯선 책을 볼 때면 제일 처음에 표지를 쓰담쓰담하는 버릇이 있다. 이 버릇 덕에 매장의 주변 소음은 사라지고 눈이 손 끝에 달린다. 매장이 주는 매력이다. 


이 날 사진코너에서 느낀 점은 어떻게 하면 사진 잘 찍을 수 있을지에 대한 기술서가, 많아진 사진 인구만큼이나 다양했다는 것이다. 부탁한 이에게 추천하기에는 적당한 책은 아니었다. 그 중에 딱 한 권 내가 먼저 읽지 않고 추천할 수 있었던 책은 포토넷에서 나온 방랑. 이 책은 여러번 페북에도 추천글이 올라오고는 있었지만 아직 읽지 않은 책이었다. 글도 좋았지만 세로 사진이 주는 프레임의 긴장감이 손 끝만이 아니라 온 몸으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좋아하는 책을 추천한 셈인데 그의 프레임의 완성도를 볼 때 좋은 친구로 옆에 놓고 두고 보지 않을까 싶다. 


결국 서점에서 추천할 수 있는 책을 고르는 일은 포기했다. 좋은 책을 알아볼 깜냥도 안되거니와(자꾸만 나의 기호가 먼저 작동하는 바람에) 부탁받은 사람에게 맞는 책을 고르는 일은 어려웠다. 그렇다고 아무 책이나 권하고 싶지도 않지도 않았다. 이럴 땐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게 제일 좋다. 그 중에 박태희 사진가가 쓴 <사진과 책>. 한 사진가와 살아온 14권의 사진책들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책이다. 몇년 전 사진에 대한 아무런 지식도 없을 때 읽은 좋은 책이었다. 집에 돌아와 다시 들춰보니 내 마음이 닿는 곳마다 색색으로 밑줄이 그어져 있다. 밑줄을 따라 다시 펼쳐보아도 역시 좋다.  들어가는 말에 이렇게 쓰여 있다.


"......사진을 찍기 시작하면서 내게 사진 공부란 사진책을 들여다보는 일이었다. 사진책을 펼치면 꿈속을 걷듯이 현재의 공간과 시간을 벗어난 완전히 다른 세계가 전개되었다.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사진책을 만나는 경우는 살면서 잊지 못할 사람을 만나는 딱 고만큼의 확률로 찾아들었다. 담벼락 뒤에 숨어 남몰래 흠모하는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는 것처럼 나는 이런 사진책을 곁에 두고 밀애의 감정에 젖어들곤 했다. 전혀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눈빛을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서로의 인간성을 공유하려 했고, 도처에서 펼쳐진 켜켜한 삶의 장면들을 목격하면서 아픔을 나누었으며, 수수께끼 같은 이미지를 뚫어져라 응시하면서 인생의 질서를 묵상했다....."


한 사진가가 묵상한 14권의 사진집이라면 뭐~ 이따위 책을 추천했냐는 소리는 듣지 않을 듯하다. 나는 비록 추천한 책 중에 4권 밖에 보지 못했지만 당시 박태희 사진가의 글에 흠뻑 빠져서 읽었었다. 사진가들은 흔히 사진은 발로 찍는다고 한다. 그만큼 많이 걸어야 한다는 뜻이다. 박태희 작가는 몸으로 글을 쓴 듯 하다. 많이 걸었다는 뜻이 아니라 온 몸으로 이 사진집들을 느끼고 사진과 사진 사이의 호흡마저 읽어냈다. 마치 글의 행간과 행간을 읽듯이. 


당시 한 눈에 반해 허겁지겁 읽었다면 이제는 처음부터 천천히 다시 읽고 싶어졌다. 이제는 어떤 밑줄이 다시 생길지... 나의 오지랖 덕에 아주 많이 늦은 리뷰를 한 셈이다. 그래서 오지랖 넓게 밑줄 몇 개 더~~


".....화가는 중심에서 선을 긋기 시작하고 사진가는 사진의 테두리에서 표현하기 시작한다. 사진의 프레임이 내용을 결정한다....... 이 프레임이 바로 사진가가 찍은 사진의 시작이다. 이 프레임은 사진에서 당구대의 쿠션과 같은 역할을 한다."


".... 처음엔 자신 안에 억제된 응어리를 표현하기 위한 욕망으로 사진기를 잡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욕망과 화해하고 삶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로 사진을 찍는 모든 사진가들에게 이들은 각자의 사진으로 입을 모아 얘길한다. 


짧지만 또한 긴 인생길에서 마음의 눈으로 볼 때, 모든 대상은 우리와 하나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