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순택의 사진전 망각기계에 다녀와서
여기, 한 남자가 누워 있다.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면 팔을 베개삼아 잠깐의 잠을 청한 듯 모로 누워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남자는 체크무늬의 잠바를 입었고 바지의 주름은 삶의 주름을 짐작할 수 있을 만큼 깊고 굵다. 그리고 발목까지 단정하게 올라간 양말과 발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는 작은 신발까지 한 눈에 훑을 정도다.
다시 남자가 누워있는 곳을 천천히 들여다보니 토끼풀이 무성한 들판이다. 그리고 토끼풀이 꽃을 피운 걸로 보아하니, 그리고 남자의 옷차림으로 보아하니, 날씨는 한 여름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한 낮의 날씨는 더울 수 있으나 들판에 누워 잠을 청하기에는 그리 따뜻한 잠은 아니었을 것이다. 혹시 낮술 한잔한 취기를 빌리면 이곳에서 쪽잠을 청할 수 있으려나 싶기는 하다.
아니, 지금까지 내가 말한 건 솔직하지 못하다. 왜냐면 나는 처음 이 사진을 보는 순간, 가슴 한켠 찡한 무엇이 올라왔었다. 내가 처음 눈이 간 곳은 이 남자 등 뒤로 짙게 드리워진 그림자였다. 위 사진은 그 깊이를 잘 드러내진 못하지만 전시장에서 본 원본의 사진은 그 그림자가 특히나 짙었다. 마치 뗄레야 뗄 수 없는 업보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만약 옆에 사람이 없었다면 나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한 방울 흘렀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다행히도 침을 삼키며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해야 했다. 그리고 눈물을 흘러내리지 않게 하려면 얼른 눈을 껌뻑거려야 했고, 이 남자의 모습을 찬찬히 눈에 담아야 했다. 가슴 한켠 아련함을 한 주먹 안고서 말이다. 그러니 글의 순서와 내가 사진으로 받은 첫 인상은 시간상으로 앞뒤가 바뀌어 있다. 아직도 나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고 싶은 모양이다.
그리고 나는 사진으로부터 뒷걸음치면서 사진과 거리두기를 해봤다. 전시장에 가면 가까이 보기와 멀리보기를 반복하는 버릇이 있는데 이렇게 보면 처음 보았던 인상과 또다른 해석을 할 수 있는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예외없이 천천히 이 남자와 거리를 두기 시작하자 남자의 잠이 모로 누운 불편한 잠이 아니라 어머니 자궁 속에서 잠들어 있는 편안한 잠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더구나 가까이 볼 때 업보처럼 드리웠던 그림자가 멀리 보니 남자의 무게를 충분히 감당하여 감싸안으니, 마치 남자는 처음 생명으로 잉태할 때 가졌던 태초의 평안으로 잠들어 있는 모습으로 비춰졌다. 비록 현실은 구구절절 사연이 많으나, 꿈 속에서만큼은 평안을 빌어주고 싶은 작가의 마음이 사진에 반영이 된 것은 아니었을까. 하여 나도 비로소 아련한 마음을 내려놓고, 작가의 마음에 기대어, 이 남자의 평안한 잠을 빌어주었다.
여기서 잠시 작가노트를 빌어오면 이 남자의 사진을 찍은 때는 2007년 5월 늦봄, 남자가 누워있는 곳은 운주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운주사는 1980년 광주항쟁 이후의 수많은 유가족들이나 희생자의 친구들이 와서 마음을 달래는 곳이다. 작가는 이 남자의 사진 옆에 운주사 산기슭에서 담았던 와불을 함께 전시했다. 와불과 이 남자의 이미지가 겹친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란다. 혹시 작가는 부처님과 남자를 나란히 눕혀놓음으로써 남자의 가슴 속의 울분을 위로해주려는 건 아니었을까.
그리고 또다른 사진 하나. 비닐 포장지에 쌓여있는 꽃 한송이. 나는 그 꽃이 장미였는지 아님 흰 국화였는지는 잊어버렸다. 다만 그 꽃송이를 싸고 있는 비닐 속의 수증기는 똑똑히 보았다. 차마 흘러내리지 못한 눈물처럼 비닐에 덕지덕지 서려있는 젖은 자국들. 아마도 광주묘역에 가면 아직도 흘리지 못한 서러운 눈물이 많다는 것을 작가는 말하고 있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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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에 볼 일이 있어 나갔다가 학고재에 들러 노순택의 사진을 다시 보고 왔다. 글을 쓸 때 약간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어서 였다. 남자의 그림자가 짙다고 하였는데 위의 사진과 거의 비슷한 수준의 그림자였다. 그런데 나는 왜 그렇게 짙게 보였었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조명 때문이었을까? 일단은 조명 탓으로 돌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그래도 글을 쓰기 전에 한번 더 확인했어야 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분명한 것은 남자 등 뒤로 흐르던 그림자가 그리 짙지 않다는 것. 그러니 이 부분은 내가 잘못 읽은 것이다. 다음에 글을 쓸 때는 몇번이고 다시 보고, 확인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사진과 멀리 떨어져서 볼 때는 내가 처음에 본 느낌을 여전히 받았다. 아마도 그 느낌 때문에 남자 등 뒤의 그림자가 사진보다는 더 짙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계속 갖고 있었던 듯 싶다. 다음엔 꼭 확인해보고 글을 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