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한 수를 기다리며
책 디자인은 흑백이 칼라보다 어렵다. 흑과 백 그리고 그레이로 표현되는 회색 계열의 톤들. 점과 선들은 회색계열이 흑이며 그 외의 것들은 백으로 표현되는 것이 책이다. 그래서 북 디자인 중에 1도짜리로 인쇄된 정갈한 책이 책 만드는 사람들에겐 가장 난이도가 높은 책이다.
칼라북은 어떤가. 책 내용에 따라 칼라군을 선택하고 내용에 맞는 적당한 이미지를 고른다. 이미지에 어울리는 색상군을 나열해보면서 내용을 더 잘 드러낼 수 있다면 색상 선택을 잘 했다고 할 수 있다. 어느 때는 내용보다 디자인이 더 잘 드러내는 경우가 있는데 이럴 때 디자이너의 역량이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내용보다 포장이 더 잘 된 경우라 할 수 있다. 디자인과 책 내용이 서로가 잘 드러낼 수 있다면 필자도 디자이너도 독자도 모두 만족할 수 있는 책으로 탄생하게 된다.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도 이미지를 표현하는 색상군을 화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고흐의 그림에서 고흐풍의 색상을 금방 알 수 있는 것도 그만의 붓터치와 그 만의 색이 지닌 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북 디자이너나 화가의 경우는 색상을 스스로 지배할 수 있다.
사진의 경우는 이미지도 색도 사진가가 선택할 수가 없다. 주어진 환경과 주변에 널려있는 색상에서 자신의 이미지를 건져내야 한다. 사진가가 색상도 이미지도 스스로 재현해 낼 수 없으니 외부의 환경에 전적으로 의지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사진가에겐 신의 한 수가 필요하다. 브레송의 사진에서 보여주는 정지된 순간의 이미지는 사진가가 그 사진을 찍었기에 브레송 사진이기도 하지만 그 순간 그런 행동을 하는 누군가가 나타나야 하며 그 순간 빛이 가장 적절해야 한다. 신의 한 수가 작용한 순간이다. 순간의 떨림을 지닌 사진을 보면서 신의 은총 내지는 신의 은혜라고까지 표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많은 사진가가 흑백으로 이미지를 건져냈다. 브레송의 경우도 흑백으로 이를 표현했다. 스티브 매커리는 칼라로 표현했다. 사진가 스스로 화가나 북디자이너처럼 색상을 통제하고 지배할 수 있는 경지가 그래서 어려운 것이다. 어렵다고 못할 것까지는 없다. 다만 흑백과 칼라 사이에서 고민이 된다는 것뿐. 더구나 색을 통제하는 수준까지 이르는 길이 쉽지 않다는 것일 뿐.
사진가가 신의 은총, 은혜를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사진가 최민식은 부산 자갈치 시장을 매일 걸었다. 똑같은 곳을 매일 걸었으나 늘 똑같은 사진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 부지런히 걸어야 하고 부단히 기다려야 한다. 화가가 수많은 터치로 날밤을 세우듯 사진가는 한 장의 사진을 위해 좋은 곳에 자리잡고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마치 낚시꾼과 같은 이치다. 좋은 곳에 자리잡은 낚시꾼은 낚시대를 드리우고 한없이 기다린다. 오죽하면 시간을 낚는다고 할까. 입질이 올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 사진가가 원하는 이미지를 얻기 위한 기다림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 늘 마음이 가는 장소에 매일매일 드나들면서 하염없이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것, 이것이 사진이다.
많이 걷고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 그리고 마지막 신의 한 수, 은총에 기대는 것, 내가 사진을 좋아하는 이유다.
(이 부분은 많은 생각을 요하고 정리를 좀 해야 할 듯. 그래도 여기까지 정리한 부분을 올려본다. 이후로 또 생각이 정리되면 더 써보리라. 칼라 사진과 흑백 사진 사이에서 다듬은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