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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보♥타코

얼마나 좋으세요...


나는 아직도 사람들을 만나면 '딸이 대학가서 얼마나 좋으세요?' 라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대학은 지천으로 많은 것 같은데 서울에 있는 대학 가려면 중학교 때부터 공부만 열심히 해야만 하는 실정에서 거저 대학에 보냈으니 얼마나 좋으냐는 의미가 들어있다. 그리고 아직도 개천에서 용나는 경우가 있다며 부러워하기도 한다. 사실 이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정말 좋은지, 남들이 바라보는 것만큼 좋은지 뒤돌아보게 된다.

일단, 우리나라에서 가장 힘들다는 대학 문제는 해결되었으니 그건 좋은 것 같다. 게다가 실컷 놀다가 대학에 가야하는 시기에 목표를 정하니 그동안 힐끔거리며 딴짓하던거 다 접고 한번에 붙어준 것만해도 고맙고 기특하다. 실제로 딸은 공부만 했다고 하던데 옆에서 보는 나는 공부만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여전히 만화책 힐끔거렸고 드라마나 애니메이션 목록을 잘 접수해뒀다가 시간이 나는 하루내내 드라마만 본 적도 많았다. 학원에 다녀오면 개콘, 무한도전, 일박이일, 패밀리가 떴다는 무조건 챙겨서 봤으니 그리 공부하는 시간이 많았다고는 볼 수 없을 것 같다. 물론 나도 다른 고3 엄마들이 하는 텔레비전 숨죽이며 보는 일은 안해서 좋았다. 오히려 유일하게 그 시간에 식구들이 낄낄거리며 볼 수 있는 시간이라 은근히 그 시간을 기다리며 간식까지 대령했다가 같이 봤다. 이렇게 노닥거려도 되는지 속으로는 걱정이었지만 한번에 대학 못가면 어떠랴, 그저 즐겁게 공부하는데 초점을 맞추니 나의 조바심이 수그러들었었다.


외국인에게 질문하는 문지. 노란 옷을 입고 있다.



딸은 대학에 들어가니 날개가 달린 듯 하다. 그동안 그 열정을 어디다 다 감추고 살았는가싶게 뭐든 열심히 한다. 한국에서라면 길에서 누구에게도 말도 못붙이던 아이가 일본에서는 길가던 외국인을 붙잡고 되든 안되든 영어로 묻고 답하기를 하지 않나, 5대학 연합 써클에 가입해서 영어연극을 한다며 거의 한달여를 신입생 쫄다구로서의 막일을 마다하지 않고 하질 않나, 교통비를 절약해야 한다며 자전거를 타고 지하철 환승역까지 가서는 가장 짧은 구간만 타고 대학을 다니질 않나, 아침잠 많은 딸이 점심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질 않나... 도통 집에서는 하지 않던 일을 그곳에서는 열심히 하고 있다. 게다가 재밌다고 하고 있는 걸 보면 그동안 감춰둔 날개를 쫙 편게 틀림없다.

그럼 그런 딸을 보는 내 입장은 어떨까. 딸이 좋아하고 열정적으로 사는 모습이 보기에 좋다. 하지만 안쓰럽다. 엄마가 옆에 있었으면 하지도 않아도 될 밥하기며 빨래, 쓰레기 분리수거까지 시간 쪼개가면서 하는 걸 보면 안쓰럽다. 아마 이렇게 비유하면 이해가 될까. 돈잘버는 아들을 둔 부모의 마음이랄까. 돈잘버는 아들이 서울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뿌듯한 부모의 심정같다. 비록 그 아들이 돈은 잘 벌어 용돈은 두둑히 주지만 마음은 곁에 사는 농사짓는 아들만큼 살갑지 않은 느낌. 돈은 풍족하게 벌지 못하지만 아침 저녁 얼굴보며 밤새 안녕하신지 다리 주물러주는 아들이 아니라 서울 어딘가에서 자기 일 열심히 하고 있을 든든한 큰 아들같은 느낌이다. 그런 큰 아들을 둔 부모는 그곳이 서울 어딘지 모르지만 아들의 안위와 염려로 늘 한쪽 마음이 뭉큰하게 얹혀져 있을 것 같다. 나의 심정도 그러하다.

딸 대학가서 얼마나 좋은지 물어보는 것 외에 '딸 보고 싶지 않아요?'라고 묻는 질문도 많다. 어찌 보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요즘은 인터넷 문화가 발달되어 있어서 전화 통화 뿐만 아니라 인터넷 화상으로 거의 매일 딸의 얼굴을 보고 딸의 목소리도 듣는다. 그래서 '요즘은 매일 인터넷으로 얼굴보고 얘기하니까 그렇게 많이 보고 싶지는 않아요'하고 답한다. 사실 매일 목소리 듣고 얼굴보니 얼굴 매만지지 못해서 그렇지, 밥을 같이 못먹어서 그렇지, 예전처럼 아주 답답할 정도는 아니다. 더구나 적당히 바쁜 일이 있는 내게는 딸의 부재가 곧 나의 자유를 의미하기에 그리 나쁜 것만도 아니다.

하지만 저녁시간이 되어 딸이 집에 들어와야 할 시간에 들어오지 않거나, 어제처럼 분명히 인터넷은 켜있는데 불러도 대답은 없거나 전화는 연결이 되는데 전화를 받지 않으면 한쪽 가슴이 툭 내려앉는다. 토요일 저녁에 딸과 통화했다. 분명 그 시간에 잠잘 시간이 아닌데 잠결에 전화를 받는 것이다. 너무 피곤해서 일찍 잠들었다고 하길래 미안해서 얼른 끊었는데 그 다음날 전화도 안되고 인터넷으로 불러도 대답이 없는 것이다. 어디가 아파도 단단히 아픈 모양이란 생각이 들었다. 당장 달려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아픈건 아닐까 생각하니 잠이 오질 않는다. 더구나 아픈 것이 아니라 혹시 집에는 컴퓨터 켜놓고 나갔다가 핸드폰을 잃어버리고 나쁜 일이 있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전화선으로 연결된 딸하고와의 가녀린 끈, 그것 하나를 붙잡고 나는 계속 어둠 속을 헤매기 시작한다.

어둠 속을 헤매면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더이상 나쁜 상상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무릎끓고 엎드려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 간절히 기도하지만 불안한 마음은 걷잡을 수 없다. 전화선에 의지해 딸의 안부를 챙겨야 하는 나의 믿음은 불안하고 허약하다. 밤새 깜깜한 어둠과 씨름하면서 딸의 안부를 가느다란 선에 의지하고 있던 나는 너무나 허약한 믿음 앞에 납짝 엎드린다.

나에게 사람들이 또 묻는다면 자식은 곁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있지 않은 곳에 두시라고 말하고 싶다. 특히 평소는 덜하지만 딸이 아플 때는 더욱 그러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언제든 보고 싶으면 볼 수 있는 거리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하면서 사는 모습을 보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하고 싶다. 딸이 선택한 인생이기에 그가 가는 길 꿋꿋하게 지지해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기는 하지만 가녀린 선에 의지해서 보낸 한밤이 너무나 길었다. 가녀린 선을 내려놓고 나의 손을 기도하는 손으로 만들었지만 딸이 홀로 떨어져 공부하는게 남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행복한 것만은 아니다. 왜냐면 마음 한켠 늘 뭉퉁하게 자리잡은 그리움이 점점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영어 발표회 때

일본 친구들과 놀러갔을 때



일본 불꽃놀이축제 때 일본 전통의상을 입고 교회식구들과 함께 축제를 즐기고 있는 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