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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 보는 세상

흑설공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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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딸 책상에 흑설공주 이야기라는 책이 놓여있었다. 제목만 봐도 동화를 재구성한 것이라는 알 수 있었다. 딸이 그 책을 볼 때는 동화를 거꾸로 읽을 줄 아는 것에 흐뭇했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 우연히 내가 이 책을 다시 읽게 된 첫 느낌은 의도가 너무 신선하다는 점이었다.  저자 바바라 G. 워커는 유명한 여성학자로서 남녀평등에 대한 탁월한 시각으로 폭넓은 공감을 얻고 있다고 한다. 아마도 여성학을 전공하는 이들에게 바바라 G. 워커는 낯선 이름은 아닐 것이다. 또한 첫 번째 동화 흑설공주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글 앞에 이런 글을 실려있었다.

동화를 보면 계모는 주로 사악한 인물로 묘사된다. 못된 계모의 전형은 특히 '백설공주'에서 나타난다. 여기서 계모는 백설공주보다 얼굴이 덜 예뻤다는 것에 분노했다는 점, 두 번째는 마법을 쓸 줄 알았다는 점 때문에 악인으로 묘사된 것 같다. 여기서 우리는 백설공주의 계모를 악인으로 몰고 간 두 가지 의미를 유추할 수 있다. 남성의 성적 반응은 시각적 요소에 따라 상당히 좌우되기 때문에 여성의 미추는 남자들에게 더 큰 관심거리였을 것이다. 따라서 한 여성을 미의 등급을 매긴 잣대의 눈금 어딘가에 놓은 일은 아무래도 남성들의 아이디어인 듯 싶다. 여성들 스스로는 서로 경쟁하지 않아도 수천 가지 다양한 유형의 아름다움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여성의 영적 능력의 마지막 보루인 마법은 중세 교회의 마녀사냥으로 그 위상이 추락했다.(당시는 기독교 이전 시대 여사제들의 후예인 산파, 간병인, 약초를 재배하는 여성, 카운슬러, 마법사를 마녀로 취급했다.) 따라서 왕비가 마법까지 갖고 있다면 정치적 영향력에 영혼의 권위까지 갖춘 셈이므로 질투심 많은 남성들에게 분명 무시무시한 존재로 비쳐졌을 것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에서는 왕비를 보다 사실에 가까운 인물로 재조명했다. 그리고 항상 대결구도로 나타나는 두 여성의 이야기를 우정으로 바꾸었다.

이 부분을 읽을 때만 해도 참 바람직한 발상이며, 여성학자다운 시각이라는 생각과 예전에 내가 가졌던 왜 계모인 왕비는 백설공주를 그렇게 못살게 굴었을까...라고 생각하며 이 동화를 읽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하여 나는 이 동화에 적잖이 기대를 한 것 같다. 그런데...
저자 바바라 G. 워커의 의도대로 동화는 그렇게 잘 쓰여졌다. 그런데...
갑자기 너무 재미가 없어졌다. 백설공주를 읽으며 사악한 왕비에게 쫓기는 백설공주가 너무나 태평하여 조마조마하게 했던 어린 시절의 떨리는 기억이 없는 것이다. 왕비가 건내는 사과를 받아든 공주에게 그걸 먹으면 안된다고 소리치던 긴박감이 없어진 것이다. 다시 쓰여진 이 동화는 작가의 의도대로 잘 그려져 있지만 글읽는 재미, 그러니까 너무 교훈적이며, 남녀평등사상에 입각하여 글을 쓰다보니 표현과 감동을 앗아간 점은 너무 아쉽고 또 아쉽고 안타깝기까지 하다. 여성학자적인 관점을 유지하면서 동화작가로서 역량있는 작가와 손잡고 이 동화가 다시 구성되어졌다면 훨씬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에 아쉬움을 떨쳐버릴 수 없다.

이후에 쓰여진 못난이와 야수, 개구리 공주, 릴리와 로즈, 막내 인어공주, 신데헬 등등의 동화를 다 읽어보지 않고 나의 아쉬움을 적은 것이라 뒤로 갈수록 감상과 느낌이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바라기는 작가의 의도를 충분히 담은, 그러나 책읽는 재미를 앗아가지 않고 쓰여졌기를 기대하면서 뒷부분도 계속 읽어보고 나의 후기를 적어볼 생각이다.
그래도 동화 거꾸로 보기, 그러니까 시각을 달리하여 동화를 바라본 점에서는 아무런 이의를 달고 싶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