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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 보는 세상

에세이 _ 엄마를 닮은 집




평생 일만 하신 할아버지. 머리가 아파도, 발가락 마디가 잘려 나가도 드러누워 쉬지 않는 할아버지. 네 발로 엉금엉금 기어 밭고랑을 이는 할아버지. 

잘 알려진 영화 워낭소리에 나온 할아버지의 모습이다. 영화 워낭소리는 40년 동안 할아버지와 함께 한 소가 주인공인데 나는 소보다 할아버지의 삶이 클로즈업되어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다.


엄마의 아침은 우리를 깨우기 전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부시시 일어나 마루에 앉으면 문 앞에 이미 열개가 넘는 양은 도시락이 차곡히 쌓여져 있었으며 서둘러 세수를 끝내고 오면 식구 수만큼 밥상도 차려져 있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재빨리 밥상을 물리고 학교로, 일터로 떠났다. 그때까지도 엄마는 밥상에 앉지도 못했다.


내가 다섯 살 때 엄마는 혼자가 되었다. 우리 7남매도 고스란히 엄마에게 남겨졌다. 홀로 남겨진 엄마에게 7남매를 키우는 일이란 워낭소리의 할아버지의 삶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한시도 쉬지 않고 일해야 했다. 실제로 엄마는 워낭소리의 할아버지처럼 몸이 아파도 손마디가 갈라져 피가 나와도 하얀 반창고를 칭칭 감고 일을 해야 하는 고단한 삶이었다.


부지런한 엄마 덕분에 엄마 혼자 처음으로 집을 장만했다. 3층짜리 연립주택이었다. 산을 깎아 지은 집이라 동네에서 가장 높았고 집 바로 뒤에 산이 있어 한 여름에도 문만 열어놓으면 바람이 잘 통해 시원했다. 우리 형제들은 나이가 들어 짝을 찾아 떠날 때까지 모두 함께 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막내 동생이 결혼과 동시에 그 집을 떠나왔다. 그 무렵, 엄마집 주변은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조성되었고 우리집도 재개발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2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우리집은 여전히 그곳에 섬처럼 존재하고 있다. 엄마도 섬처럼 그 집에 홀로 남았다. 


“고모, 할머니가 이상해...”

조카에게서 전화가 왔다. 목소리가 스산했다. 이상하다니... 이상하다는 단어가 주는 암시는 딱 들어맞았다. 노인성 치매였다.


조카의 전화를 받은 날 저녁에 식구들은 모두 엄마 집에 모였다. 이상하리만큼 더운 날이었다.  조카가 말한 이상한 행동은 엄마가 입은 옷으로 나타났다. 이미 몇 벌의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도 춥다며 옷을 계속 껴입으려고 했다. 바지 입는 것을 도와드렸다. 그리고 생각보다 엄마가 가볍다는 사실에 내 손은 몹시 허둥댔다.


식구들은 조용히 저녁을 먹었다. 이상한 행동을 가장 먼저 눈치챈 조카도 말이 없었다. 말을 아끼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한 사람씩 집 밖으로 나왔다. 

지는 저녁해는 고층 아파트 사이로 맹렬히 쏟아졌다. 순간 저절로 눈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허름한 엄마의 집이 보였다. 벽이 갈라지고 칠이 벗겨진 몹시 낡은 집이다.  벗겨진 틈 사이로 철근도 툭 불거져 나와 있었다. 얼마나 오래도록 저런 상태로 있었던 것일까. 흘러내린 녹물 자국이 길고 시뻘겋다. 


문득 엄마의 눈물 같았다. 아픈 몸을 자식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혼자서 몰래 흘렸을, 그 눈물. 나는 순간, 엄마의 눈물을 몰래 훔쳐본 느낌이랄까. 낡고 허름한 집은, 평생을 다 내어주고 빈 껍데기만 남은 엄마의 몸과 닮았고, 높고 빛나는 고층 아파트는, 엄마가 낳은 자식들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워낭소리의 할아버지를 만났을 때 엄마의 병이 시작되었으니 오래된 얘기다. 그리고 아픈 엄마는, 오늘도 기억을 하나씩 지워가면서 엄마를 닮은 낡고 허름한 집에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