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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 보는 세상

대화 1 --- 리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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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선생이 얻은 경외심, 깊은 부끄러움 속에서 귀중한 깨우침을 얻은 세가지 이야기.

첫째는 진주기생과의 사건.
지리산 전투 와중에 진주 시내의 허름한 술집에서 회식이 있었다. 그때 리영희도 진주 기생과 같이 술을 마시고 나중에 따로 나가자고 했는데 그 기생이 회식 중간에 사라졌다. 술김에 그 집을 찾아가서 큰 소리치면서 따지자 그 여자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툇마루에 나와서 리영희를 내려다보면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모습에 압도당해 허리에 찬 권총을 빼들고 마당에 한 발 쏘며 그 여자에게 내려오라고 소리질렀다. 리영희 생각에 제가 논개가 아닌 바에야 그까짓 기생이 버선발로 달려 내려와서 무릎 끓고 살려달라고 빌 줄 알았단다. 그러나..

"그렇게 사람을 총으로 겁을 줘서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젊은 장교님은 나중에 큰 분이 되겠지만 사람을 그렇게 다루는 것이 아닙니다. 진주기생은 강요당해 아무데나 따라가지 않습니다."
나는 그 훈계에 기가 죽어버렸어.
내가 얼마나 왜소한 인간인가! 보잘것없는 술집 여자라고 업신여긴 상대방의 그 당당한 기백이 인간적으로 얼마나 위대한가! 나는 그 기생에게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압도당했어요. 나는 큰 절을 하고  깊이 사죄한다는 말을 남기고는 머리를 숙인 채 가만히 걸어 나와서 지프차를 몰고 돌아왔어요. 그 기생의 인간적인 큼 앞에서 내가 얼마나 왜소한지를 절실히 깨달았어요. 살면서 처음으로 인간의 크기, 도덕적인 크기를 깨닫게 해준 사건이었어. 참으로 나에게는 귀중하고, 어쩌면 고귀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깨달음의 기회였어요.

둘째는 뒤바뀐 삶과 죽음의 자리.
부대에서 빨치산에게서 노획한 소련제 권총을 선물로 받았다. 그때까지 권총이 없었던 리영희에게도 권총을 받을 기회가 됐는데 멋진 소련제가 아닌 미제 카빈을 받았다고 한다. 그게 불만이었던 리영희는 사단 작전회의에 꾀병을 부리고 가지 않겠다고 하자 신임 통역장교가 자기를 대신 보내달라고 사정을 했단다. 그래서 리영희가 한번도 입어보지 못한 신품 파카를 입혀주면서 잘 갔다오라고 했는데... 지리산 근처에서 인민군에게 공격을 받아 그 신임장교가 그 자리에서 죽었다...

그때까지 나는, 사람은 과학적이고 치밀한 합리적 논리, 자기 의지로 좌우되는 법칙과 같은 것을 바탕으로 산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막상 삶과 죽음의 자리가 뒤바뀌는 기묘한 상황에 처해보니, 죽는 것은 인간의 그런 이성이나 계산을 완전히 초월하는 하늘의 뜻이 아닐까, '우연의 장난'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구만. "인명은 재천이고, 세상만사는 새옹지마"라는 옛말이 머리를 스쳐갔어. 만약 내가 권총을 받았더라면 신나서 차에 탔을 테고, 이 자리에서 죽었을 텐데. 권총을 안 준다고 꾀병부리면서 피했기 때무에 박 중위가 나 대신 죽었구나. 모든 일이 어떤 운명의 연쇄나 우연의 연쇄 속에 벌어지는 '새옹지마'같은 것이로구나, 우연이란 것의 큰 힘, 하나하나의 현상만으로는 인과관계의 큰 뜻을 헤아릴 수 없구나! 이런 비과학적 생각을 하게 된 거지요. 이런 경험 때문에 지금까지도 사람의 목숨이란 자기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일종의 운명론을 믿고 있어요.

셋째 강원도 건봉사 공격작전 때의 일

교만했던 리영희가 거듭되는 인간적인 깨달음 속에서 겸손이라는 덕목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실감했던 사건이라며 이야기를 시작한 건봉사 사건.
건봉사는 본래 99칸의 대사찰이었는데 미군 폭격으로 완전히 잿더미가 되어 버렸다. 사람이 없는 절인 줄 알고 살피고 있던 리영희와 같이 간 소령은 구석진 암자에서 사람이 나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권총을 빼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나이가 한 40세 정도 돼 보이는 스님이 한 분 나오더니 공손히 절을 하며 마당 옆에 있는 작은 곳간을 가리키며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얘긴즉슨 종교를 미워하는 인민 공화국 군대도 여기서 5~6명의 스님들이 농사지은 채소나 호박 같은 것을 말려 자급자족하며 사는 것을 여태까지 건드리지 않았는데 어제 국군의 수색중대가 들이닥치더니 다짜고짜 곳간 문을 수부고 들어가 그 식량을 모두 가져가버렸다는 것이다. 종교를 숭상한다는 남조선의 군대가 자기들을 보호할 생각을 하기는 커녕 진격해 들어오자마자 말 한마디 없이 곳간의 식량부터 털어가는 것을 보고, 남아 있던 중들이 배신감을 느껴서 어딘가로 뿔뿔이 헤어졌다고...

우리 두 사람이 가슴에 총을 겨눴는데도 미동도 안하고, 진주기생만큼이나 의연한 자세로 조용히 우리를 타이르는 모습이 그야말로 생사를 초탈한 사람 같더구만. 대단하더군! 며칠 뒤에 가보니 그 스님도 사라지고 없었어. 대한민국 국군이란 그런 집단이었다고. 참 한심한 일이지. 아무런 무기도 갖지 않은 알몸의 스님이, 피비린내나는 전쟁판을 달려 올라온 군대의 두 장교가 자기를 겨누고 있는 권총 앞에서, 태연하게 마치 타이르듯이, 아무런 두려움의 기색도 없는 자태와 말로써 우리에게 대했던, 그 부처의 제자다운 모습에 나는 감복했습니다. 그리고 형용할 수 없는 부끄러움과 자기 모멸에 빠졌어요. 나는 여기서 다시 진주의 그 기생에게서 받았던 것과 같은 새로운 깨달음의 벅찬 감동과 기쁨을 느꼈습니다.



역시 대가들은 통하는 데가 있다. 일전에 김종일목사님과 만났을 때도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목사님도 전쟁에서 숱하게 죽는 사람들을 봤으며 목사님만 살아남고 같이 있던 사람들이 죽었을 때 무서웠다고 했다. 왜 내가 살아남았을까... 그때 감사하다기 보다는 두려움을 느꼈다고 했다. 만약 하나님께 자신만 살아남아 감사하다고 기도하면 죽은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므로... 아마도 하나님에 대한 감사는 살아남은 자의 두려움이 아닐까... 또한 그 두려움은 죽은 자에 대한 살아남은 자의 예의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죽음의 현장에서 나 혼자 살아남았을 때 나도 살아남은 자의 두려움으로 살아야 하는 건 아닐까... 아마도 그 두려움이 하나님에 대한 가장 지극한 감사의 표현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사람의 크기는 인간됨의 크기이며 도덕적인 크기이며 더 덧붙이자면 사랑의 크기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런 글들을 볼 때마다 나의 인간됨의 크기를 재본다. 부끄러워 땅 속으로 꺼지고 싶다. 리영희선생과 같은 대가도 치졸하고 치기어린 그릇의 크기를 가질 때가 있었으니 나같은 사람이야 뭐 말하면 무엇하랴... 그러면서 위로받기도 하지만 말이다^^

아직 700페이지가 넘는 이 책을 다 읽지는 못했지만 중간에 잊지 않고 정리해두고 싶어서 이 글을 남기게 되었다. 일관되게 진정한 지식인으로 살기 위해 선생이 있는 그 자리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 리영희선생. 그런 분의 책이어서 조금 묵직할 것 같지만 <대화>는 선생과 지금 내가 대화를 하고 있는 것처럼 아주 즐겁고, 무게가 있으며, 그리고 마음은 가볍다. 직접 선생을 대하면 떨려서 말한마디 못하겠지만 책이니 얼마나 좋은가....

선생은 하나님이 주신 옐로우카드^^인 뇌졸증으로 평생 쥐고 살았다면 이젠 펴고 사는 연습을 하신다고 한다. 선생은 책에서처럼 그때 그때 최선을 다해 사셨듯이 지금도 최선을 다하고 계신것 같다. 선생의 건강을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