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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속이야기

어머님과 나

처음에 어머님이랑 같이 살 때는,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어떤 일이든 느닷없이 일이 추진되곤 하던 때였다. 갑자기 김치를 해야 한다거나, 갑자기 이불 빨래를 해야 하거나, 아니면 갑자기 어딘가를 가야 할 일이 생기는 거다. 이 며느리, 머리 속에 갈피갈피 잘 집어넣었던 계획들이 한꺼번에 구겨지는 소리가 들리면서 이내 마음이 불편해지고 관리되지 못한 표정이 줄줄 얼굴에 새어나오면서 오만상이 되고 만다.

어머님은 일하는 며느리에게 일하는 동안 말하지 못하다가 일끝내는 토요일, 일요일에 집안 일들을 계획하고 계시기 마련이다. 물론 그때 나의 계획도 또 따로 있지 않겠는가. 그동안 놀아주지 못한 딸내미하고 놀아주어 하고, 일주일에 한번씩 하는 냉장고를 비워내고 다시 일주일분의 양식을 채워넣어야 한다. 그리고 나도 충분한 쉼이 있어야 또다시 일주일치의 일을 처리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어머님의 계획이나 느닷없는 집안일로 나의 계획이 밀려나면 그때부터 내 머리속 컴퓨터는 286에서 멈춰서 업그레이드 되지 못하고 버벅거리고 있다. 그 당시 컴퓨터는 모두 286이거나 386이었다.

분주한 세월을 살았나보다. 그리고 시간도 흘렀나보다. 이제는 웬만한 갑작스런 일들도 내 머리 속 컴퓨터가 덜 버벅거리는 느낌이다. 어제도 아침에 아는 분에게 달랑무를 말해 놓으셨다고 외출할 일 없으면 가져다 놓으라고 하신다. 아마도 내가 외출했던 전날 미리 털보에게 말해두었던 모양인데 우리 털보가 말을 전해주지 않는 바람에 나는 아침에 어머님에게 통보를 받았다. 예전같으면 또 버벅거렸을텐데 그 말을 듣는 동시에 내 머리 속 컴퓨터가 자리를 사삭사삭 비켜주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달랑무와 동시에 파 한 단과 생강 등 김치에 들어갈 양념들을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마도 아는만큼 여유가 생기는 건지도 모르겠다. 살림을 모르던 주부 초보시절엔 집안 일들이 모두 무섭기만 했던 기억이니까. 게다가 갑작스럽게 집안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그때 느꼈던 스트레스 강도는 가히 엄청났었던 기억이다.

아주 오래된 일이다. 우리 어머님이 어느 집을 갑자기 방문하게 되었다. 버스를 타고 갈 수도 없는 곳이라 정황으로 보아 당연히 내가 조기사가 되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전화를 미리 드렸냐고 했더니 전화하지 않고 가도 된단다. 나는 웃으면서 '어머님, 저는 갑자기 누군가가 방문하거나, 갑자기 무슨 일을 해야 하는게 가장 힘들던데요..' 했다. 그때 어머님이 웃으셨던 기억이다. 뭐든 갑자기 생기는 일에 대처하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나로서는 이럴 때가 가장 힘들었다.

어머님과 같이 산 세월과 시간을 손꼽아보지 않아도 무척 오래된 느낌이다. 이제는 어머님도 미리 말씀해 주시려고 노력하고 계신다. 언제쯤 시간이 되냐, 언제쯤 일이 한가하니, 하면서 꼭 나를 타진하신 후에 말씀하시려는 어머님. 그러면 내 머리 속에서 사사삭 자리가 비워지는 소리가 들린다. 이번에 김장담그는 일도 내 머리 속에서 자리를 비워주면 냉큼 해낼 것이다. 일이 저만치 밀려날 때쯤.

2층 베란다에는 어제 가져온 달랑무가 잘 절여지고 있을 것이다. 미리 씻어둬야 담그기 편하기 때문에 나는 이 글을 끝냄과 동시에 2층으로 올라갈 것이다. 우리 어머님이 일하는 며느리와 더구나 빨리빨리 대처하지 못하는 며느리와 잘 사는 방법을 터득하신 것에 감사하면서 찬 물에 훠이훠이 저어가며 달랑무를 씻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