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처음으로 학교 졸업하구 들어간 곳이 지금 사진의 잡지사랍니다. 그때는 그곳에서 번역일을 했었는데 워낙 번역을 못해서 자꾸만 편집 디자인 쪽으로 눈이 가는거예요. 그래서 번역을 뒤로 하고 로트링이란 걸 잡고 편집디자인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20년도 더 된 얘기네요. 그때 저는 번역보다 로트링과 편집할 때 쓰이는 하얀 대지가 너무 좋았어요. 하기야 워낙 번역을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구요...^^
그때 직업을 전환한 저는 미대나오지 않은 사람이라 참 힘들었어요. 미대 나오지 않고 편집디자인을 하는 경우는 흔치 않으니까요. 그때 아마도 저도 욕심을 냈더라면 학력을 세탁했을 수도 있어요. 왜냐면 제가 홍대에서 하는 1년과정의 코스를 마치려고 했었거든요. 그때 커리큘럼을 보니까 저와는 맞지를 않아서 그 과정을 수료하지 않았을 뿐이거든요. 그때 그 과정을 마쳤다면 저도 마지막 이력서에 홍대 미대 나왔다고 세탁하지 않았을까요.^^
결혼 후에 잡지사 생활을 접고 기획사를 오픈할 때 저의 잡지사 선배가 자신의 얘기를 들려주면서 이력서에 미대 나온걸로 하라고 귀띔해줬었거든요. 근데 그게 자신이 없더라구요. 실력도 없는데 미대 나왔다고 거짓말 하면 금방 들통이 날 것 같더라구요. 그래서 끝까지 학력 세탁을 못하고 있었지요. 물론 그 덕분에 일을 못하게 된 것도 많았답니다.^^ 아마 미대 나왔다고 하면서 일했으면 좀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을거예요. 물론 그 선배는 저에게 알려준대로 학력을 세탁하여 기획사를 운영했었지요. 아는 사람들 다 아는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싶어서 못했던 게 지금에 와서 보니 참 잘한 일이 되었네요. 하긴 제가 아는 분도 자제분들을 미국으로 보낼 때 학력 세탁해서 보내는 데 돈만 있으면 된다고 아주 뿌듯해 하셨던 것도 기억이 나네요.
어쨌거나 미대 나오지 않은 제가 책 편집하는 일로 지금도 밥벌어 먹고 사는 이유는 딱 하나 있습니다. 그때 디자이너들이 비주얼한 요소에 초점을 맞출 때 저는 글쓴이에 초점을 맞춰서 커뮤니케이션에 주목한 점입니다. 글을 읽고 글쓴이가 말하고 싶어하는 걸 잘 드러내서 읽는 사람을 편하게 해주자... 뭐 그런 이유였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저는 일을 아주 잘하지는 못하지만 천천히... 그리고 읽는 사람이 편하게... 그런 책을 만들고 싶습니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제가 처음에 만든 책들을 지금 들여다보면 얼굴 빨개진답니다. 어찌나 촌스럽고, 기본에도 충실하지 않은 책을 만들었는지요. 기본도 없이 만든 책들이었네요... 그때, 처음에, 실력도 없을 때, 저에게 책만들어 달라고 부탁하셨던 분들에게 지금은 미안하답니다. 도대체 뭘 믿고 저에게 책을 맡기셨는지...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많이 미안하고 얼굴 빨개진답니다. 제가 책만들면서 실수한 것도 많은데 다 이해해주셨던 분들에게 고마운 마음이예요...
요즘 제가 감 떨어진 것 같아서 잡지 한권을 디자인해서 벽에 붙여놓고 보고 있습니다. 선풍기 바람에 펄럭펄럭거리는 종이 소리가 참 좋군요. 제 블로그에 제 일에 대해서는 처음으로 쓰는 글인 것 같습니다...